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번의 난 (문단 편집) == 반란은 왜 실패했는가? == 불과 1년 ~ 2년만에 오삼계군은 화남을 휩쓸고 장안까지 넘볼 정도로 세력이 강성했으나 이러한 전성기는 몇 년 가지 못하고 너무 쉽게 패망했다. 청의 베테랑 장수들이 모두 죽거나 일선에서 은퇴하고 도르곤과 오보이에게 줄섰다가 죽은 사람도 많아서 군사 작전에서 오삼계군에 고전을 면치 못했음에도 이리 쉽게 무너진 건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자잘하게 제법 괜찮은 장수들이 있겠지만, 아이신기오로씨들의 능력이 압도적으로 탁월하였고, 이들이 사망하면서 약화되었다.] 첫째, '''오삼계군에게는 대의명분이 없었다.''' 원래 한 나라의 지배자가 되려면 단지 군사적 싸움에서 이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의 집권을 정당화해줄 명분을 갖춰야 하는데 오삼계에게는 그 명분이 전혀 없었다.실제 오삼계는 반란의 대의명분으로 대명의 부흥, 복수를 내걸었으나, 애초에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산해관]]을 활짝 열어 같은 한족인 [[이자성]]도 아니고 청을 맞이한 것도, 그나마 남아있던 [[남명]]의 저항 세력을 모두 박살낸 것도, [[남명]] 최후의 황제 소종 [[영력제]]를 직접 교살한 인간도 오삼계다. 만약 오삼계 자신이 주장한 것처럼 '오삼계 자신은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청군을 끌어들였던 것'인데 그 상황이 통제 가능한 수준에서 벗어나 명의 멸망이라는 결과에 이르렀던 것이라면 오삼계는 최소한 이후에라도 남명의 저항세력에 합류하려는 시도를 했어야 했다. (물론 남명 저항세력이 오삼계를 받아들여줄지는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하지만 오삼계는 단지 남명에 합류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아예 이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철저히 격파했으며 그 최후의 망명황제이던 영력제까지 직접 살해했다. 즉 단지 동조하고 참여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적대했고, 적으로써도 (그나마 한때 같은 세력에 몸담았던 자로써) 일말의 동정심조차 보여주지 않은 것. 오삼계 본인도 이를 모를 리 없기에 영력제의 묘를 참배하고 사죄하며 눈물을 흘리는 정치적 퍼포먼스를 선보였지만, 고작 15년 전에 자기 손으로 죽인 이의 무덤 앞에서 눈물 한번 흘린다고 그의 과거 행적이 씻겨나갈 리 없었다. 게다가 오삼계는 이 배신의 결과로 청의 번왕 지위에 올라 엄청난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린 인물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 당시가 유교적 명분론을 아무리 중시하던 시대였다고 해도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융통성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니 산해관을 지키던 당시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려 청나라(만주족)에 투항한 것 자체는 (욕을 전혀 안 먹기는 무리겠지만) 어느정도 이해받을 여지가 분명 있었던 것. [[오삼계#s-7|오삼계 문서의 평가 문단]]에서도 거론된 것처럼, 일단 이 시점까지 오삼계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배신자(매국노)의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니었고, 녹봉 받는 만큼은 명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도저히 더 싸울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리게 되자 항복한 것이라고 변명할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 자신이 앞장서서 명의 잔당을 소탕하고 그 대가로 본인과 가문의 영달을 얻었으니 배신의 시작은 피치 못한 상황에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졌을지언정 그 후의 행보는 아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인물이 그 권세가 너무 커져 청 조정과도 갈등을 빚게 된 상황에 이르러서야 다시 명의 부흥, 복수를 외치기 시작하니 명의 유신이나 다른 장수들, 또한 아직 명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던 백성들은 그 진정성을 전혀 믿지 않아 콧방귀조차 뀌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명나라 황족 출신을 허수아비로나마 황제로 추대하는 제스처조차 취하지 않고 본인이 기어코 직접 황제에 올랐으니 부족한 명분을 억지로나마 만드려는 노력이라도 할 생각은 있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이 때문에 오삼계 및 그 군대와 이해나 유대 관계가 얽힌 경우를 제외하면 청에 항복한 명의 항장이나 유신들이 반란에 가담한 경우는 거의 없었고 백성들 또한 지지하지 않았다. 특히 청조를 인정할 수 없다며 재야에 묻힌 명의 유신들을 오삼계군이 초빙하려 했으나 그들조차 한결같이 역적에게 충성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거절했을 정도. 더욱이 다른 항장들 역시도 오삼계에게 협조하지 않았다는 점도 오삼계의 명분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는 증거다. 오삼계의 명분이 그럴 듯했으면 그래도 오삼계처럼 항장 출신들이 몇명 정도는 가담해야 할 텐데 강희제가 "지위는 보장해줄 테니 반란 진압이나 해라"라고 하자 다들 오삼계에게 협조하지 않았다. 즉 그 항장들 눈에도 오삼계의 명분은 택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는 거다. 사실상 오삼계는 침략자인 청나라보다도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 [[후당]]의 적이었던 [[거란]]의 힘을 빌려 후당을 무너뜨리고 [[후진]]을 건국한 [[석경당]]의 경우 자기가 세운 나라가 오주와 비슷하게 [[석중귀|2대 황제]] 치세에 멸망했는데, 명나라 잔존 세력들의 입장에서 오삼계는 한족판 석경당이고 오주는 한족 왕조판 후진이었던 셈이다. 외세의 힘을 빌려 출세하고 더 나아가 창업군주가 되기까지 한 매국노가 중화문명의 수호자 코스프레를 했다는 점에서 석경당과 오삼계의 행보는 각각 후당과 명나라의 유신들에게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석경당은 오삼계처럼 뻔뻔하게 자기가 죽인 상대의 복수를 자기가 해주겠다는 주장은 하지 않았으니 좀 낫지 않느냐고 보기도 하지만 대신 석경당은 좀 더 구차하고 굴욕적인 행보를 보인 면이 있다. 일단 싸울 수 있을 때까지는 싸워보다가 도저히 다른 길이 없는 상황에 몰려서 항복하는 것으로 배신자의 행보를 시작한 오삼계에 비해 석경당은 처음부터 권력을 탐내 배신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독립 왕조의 황제이면서도 북방 이민족인 요나라에 칭신하는 것도 모자라 부자의 예(물론 석경당이 아들)까지 맺고 거란의 의복까지 받아입는 희대의 굴욕까지 받아들이면서 권력을 탐한 것. 게다가 석경당의 배신자 행보에서 심복 역할을 하던 [[유지원]]조차 '도움을 원한다면 재화와 보물로 충분한데 굳이 땅까지 떼어줄 필요가 있느냐'고 만류하는 것을 듣지 않고 굳이 [[연운 16주]]를 할양함으로써 이후 400년간 한족계 국가가 북방 유목민 국가에 대해 열세에 놓이게 된 첫 단추를 꿰기도 한 것이다.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재평가가 가능한 오삼계에 비해 석경당은 그냥 개노답 멍청이라는 것이 대중적인 평가이다.] 설령 삼번의 난이 성공했다 해도 상술한 이유로 인해 오삼계가 [[한간|한족의 배신자]]였던 점이 계속 걸림돌로 작용하는 바람에 명의 유신들 및 한족 백성들은 오주 황실을 배신자의 후손으로 보며 철저히 불신했을 것이다. 이것이 다른 문제점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낼 경우 결국 오주는 실제 역사보다 좀 더 오래가고 덜 비참해질 뿐, 실제 역사의 명나라나 청나라마냥 완전히 자리잡아 200년 이상 이어지지는 못하고 허무하게 단명했을 것이며[* 현실의 [[한자문화권]]에도 해당 대체역사의 오주와 비슷한 케이스로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가 있다. 응우옌 왕조 초대 황제인 [[자롱 황제]]도 오삼계와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기는 힘들지언정 외세의 힘을 빌려 승승장구했다는 한계가 있었던 점이 비슷하며(자롱 황제를 도와준 외세 중에는 [[아유타야 왕국]] 시절부터 [[인도차이나 반도]]의 맹주 자리를 놓고 계속 베트남과 치열하게 다투었던 [[태국]]도 있었고 [[크메르 제국]] [[수리야바르만 2세]] 치세에 베트남을 침공했던 [[캄보디아]]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자롱 황제는 조국의 상업권을 프랑스에 들어바치려는 시도까지 했다.), 이것이 계속 걸림돌이 되면서 결국 응우옌 왕조가 세워진지 약 150년 만에 멸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더군다나 응우옌 왕조 4대 황제인 [[뜨득 황제]]가 응우옌 왕조가 타국의 속국이 아니던 시절의 마지막 황제였고 그 후로 1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까지는 모두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허수아비 황제였으므로, 응우옌 왕조는 사실상 150년은커녕 100년보다도 더 짧은 기간 동안 지속되고 멸망한 거나 다름없다.], 설사 이어진다고 해도 매우 불안하게 유지되었을 것이다. 둘째, 애당초 삼번이 합심하고 계획적으로 일으킨 반란이 아니었다. 공식적 명칭은 삼번의 난이었지만 광동의 상가희는 오히려 초반에 적극적으로 반란을 토벌하려 했고, 쿠데타로 집권한 상지신도 어디까지나 정치적 목적에서 반란에 가담했다고 선언했을 뿐 실제로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채로 청조로부터 자신의 작위를 인정받는 걸 목적으로 했다. 실제로 상지신은 그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바로 청조에 항복했다. 복건의 경정충은 상지신보단 적극적으로 반란에 가담했으나 멍청하게도 힘을 합치지 못할망정 아군인 대만 동녕 왕국과 팀킬을 벌이다가 뒤통수를 맞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반란에 참여하진 못한 채 결국 제일 먼저 청에 항복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복건 자체는 그다지 풍요롭지 않은 변두리였으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복건을 지나 절강 일대까지 동녕 왕국이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경정충에게 복건을 준 것이니 원래부터가 동녕 왕국과는 라이벌이였다. 또한 서북이 산지인 복건에서 중심지역은 동남방 해안가인데, 이 앞에 대만이 있으니 경정충에게는 동녕 왕국은 자신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였다. 게다가 위에서 말한대로 명조의 충신을 자쳐하는 동녕 왕국이 배신자인 상씨를 도울 리, 연합할 리도 없었다. ] 차라리 이들이 합심해서 반란에 나섰더라면 당시 청의 상태 및 후방에 있는 [[준가르]]들을 끌어들여 연합했다면 좋은 결과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하고 망했다.[* 이들이 가진 운남, 광동, 복건은 베이징에서 먼 곳이면서 대체로 궁핍한 지역이었다.(광둥은 제외되지만, 인근의 광서와 운남 인근의 귀주도 가난한 지방)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렇다 하더라도 인구가 많은 곳도 아니였고, 그 인구도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이 포함된 숫자였다. 비록 초반에 매서운 기세를 보였지만, 사천과 섬서에서 일어난 반란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영역진출이 가능할지도 의문이 들 정도이고, 몽골은 홍타이지 시기 이미 융합한 상황이며, 준가르는 저 먼 신강지역에 거주하였다. 청의 당시 국력상 서북 제압에 실패하더라도 남방의 삼번 제압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애당초 준가르는 명나라 시절부터 중국 서북을 노략질하는 세력이었지 딱히 정치적인 세력도 아니었다.만약에 삼번이 서로 적극적으로 연계를해 난을 일으켰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으나 서로 제대로 연계가 되지 않았고 반란의 주동자였던 오삼계를 제외하면 반란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내부에서도 서로 팀킬 같은걸 벌이다 지리멸렬하게 무너져 내렸다. 셋째, 명장이자 반란의 중추이던 오삼계가 삼번의 난을 일으킨 시기에는 너무 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난을 일으킨 지 얼마도 지나지 않아서 일찍 사망한 것도 문제였다.비록 여러 문제가 얽혀있더라도 만약 그가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싸움이 장기전이 되거나 결과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다만 오삼계는 황제에 오른지 1년도 안되서 허무하게 사망한다. 마지막으로 당시 청나라 황제가 다른 인물도 아닌 '''[[강희제]]'''였다. 사실 반란의 초기 기세가 매우 거셌기 때문에 경험이 없는 황제가 공황상태에 빠져서 북원이 그랬듯이 본거지인 만주로 달아났다면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강희제는 어렸지만 절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사실 오삼계군은 더 남쪽에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거의 1500여년전 [[제갈량]]이 천하삼분지계에서 그렸던 모양새를 그대로 따라했고, 점령지만 보면 오삼계군은 [[제갈량의 북벌]]보다 성공했다. 오삼계 반란군의 주력은 사천성(제갈량 당시 촉나라 전역)를 석권했고, 촉나라가 오나라에 뒤통수 맞고 빼앗긴 형주지역도 거의 점령했다. 즉, 제갈량이 원래 천하삼분지계를 그릴 때 생각했던 조건을 거의 갖추었다는 것이다. 위 지도에서 오삼계군이 점령한 평량은 제갈량이 위나라와 티격태격하던 천수보다 훨씬 더 북쪽에 있는 지역이며, 운양은 형주 양양의 북쪽에 있으니[* (익주→)형주 서성군 운양현. 현 호북성 십언시 운양구], 오삼계군은 남서의 협공으로 장안(서안)을 함락시키기 매우 유리한 위치까지 올라온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 수도인 연경(북경)은 위나라 수도였던 낙양보다는 훨씬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조정은 흔들리지 않았고, 설령 서안이 오삼계군에 함락되었다고 해도 그다지 타격은 아니었다. 서안과 낙양의 거리는 약 300-400km이지만, 서안과 북경의 거리는 1000km이 훨씬 넘는다.[* 다만 천하삼분지계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단점이 있었는데 유사시에 도움이 되어줄 동맹이 없었다. 오삼계 세력을 촉에 비유한다면 상지신, 경정충의 세력은 위치상 오에 비유할 수 있지만 상지신은 적극적이지 않았고 경정충은 동녕 왕국과 싸우다 역관광을 당하는 등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적어도 이 둘 중 하나가 오삼계만큼의 역량을 발휘해 삼국시대로 치면 교주, 양주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점령했다면 천하삼분지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위나라 역시도 국력은 촉과 오를 합친 것보다 강했지만 북쪽의 여러 이민족들을 경계해야 하고 또 어느 한쪽도 쉽게 제압당할 만큼은 아니었기에 삼국시대가 40~50년 이어졌듯 삼번들도 '오'에 비견되는 세력이 있다면 청나라 입장에서도 병력이 제대로 분산되었어 쉬이 진압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에 청나라의 군사력, 즉 [[팔기군]] 및 만주족 장수들도 당시 건재했고, 실전경험도 풍부했다. 그 중 핵심인 몽골-만주 기병은 당연히 한족이 중심이 된 반란과 무관했다. 19세기 초에 가면 만주족들이 대륙의 풍요와 사치에 취해 야성을 잃어서 팔기군이 몰락하기는 하지만[*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서양의 전열보병에 팔기군의 기병대가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전열보병은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당대 최강의 전술이었고 기병대를 잡는 데도 탁월했다. 보통 기병대가 말을 타고 달려오면 장창부대가 그 앞을 가로막는데 이 창의 길이를 수백미터 늘려놓은 것이 바로 전열보병이었고 당연히 기병대인 팔기군은 이 전술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만주족은 아직 민족 전원이 전투원인 만주족 특유의 집단의식이 고스란이 남아 있었으며, 전투력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청나라 영역으로 남아있는 대륙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까지 고려하면, 아무리 오삼계가 산전수전을 다겪은 명장이더라도, 변방에서 모은 군대로 청나라군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한편 반란의 주동자가 오삼계가 아닌 상가희/상지신 혹은 경정충이었다고 해도 결국에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셋 다 자기 이익만을 위한 반란이었고 오삼계만한 세력과 카리스마도 없었으며 합심도 안했고 상가희면 모를까 상지신, 경정충의 경우, 특히 경정충은 대만 동녕 왕국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되려 지기까지 했으니 오삼계가 주동했을 때보다 더 빨리 망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